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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Leader&Reader '청춘 이길여' 9편 “X 표시한 환자는 먹튀 놔둬라” 동안 이길여 만든 뜻밖의 보답
- 수정일
- 2024.03.11
- 작성자
- 홍보실
- 조회수
- 1184
- 등록일
- 2024.03.11
이길여 총장이 여의사들과 함께 한 무의도 의료 봉사 당시 모습. 사진 가천대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는 용어가 있다. 마라토너가 힘든 구간을 지나면서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에 빗댄 말인데, 나눔 봉사 기부를 할 때 극적 쾌감을 얻는다는 의미다.
이타적 행동이 정신적 만족만이 아니라 실제 장수와도 연관이 높다는 과학적 연구는 이미 수차례 입증된 바 있다.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진 엔도르핀과 친밀감을 높이는 옥시토신 분비가 증가하면서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지고 만성 통증이 줄어든다는 게 공통된 결과다.
‘청춘 이길여’의 한 축을 나눔과 봉사, 사회 공헌에서 찾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김우경 길병원장도 여기에 공감한다. “내가 벌어 나만 잘 먹고 잘살면 저렇게 건강할 수 있을까요. 늘 환자와 학생을 우선순위로 두니 따르는 사람이 많아져 행복하고, 호르몬 체계가 긍정적으로 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거슬러 보면 이 총장이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부터가 업의 사명감을 넘어 약자에 대한 봉사, 국가 발전 등과 맞물려 있다.
“나는 의사 얼굴을 못 보고 초등학교에 갔어요. 의사가 뭔지도 모르고, 학교 갈 나이가 되기 전에 친구들이 죽기도 했죠.
그때 사람이 죽으면 왜 죽지, 어떻게 하면 저 아이들이 안 죽지, 그런 고민을 어린 나이에도 엄청 많이 했어요. 그때는 누가 아프면 무당이 와서 음료수나 올리고 뭐 그런 거밖에 못 했거든요. 그런데 학교에 갔더니 의사가 와서 천연두 예방주사를 놓아주고, 약도 주고 주사도 놔주더라고요. 그게 너무너무 신기한 거예요. 나도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가 돼야겠다, 그런 마음을 먹었죠.”
이 총장에게 의사의 꿈을 심어준 이영춘 박사. 이 박사는 평생을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던 농민들을 위해 봉사하며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렸다. 이 총장이 다니던 대야초등학교 등 학교를 돌며 아이들을 진료하기도 했다. 사진 가천대
동년배에 대한 ‘부채 의식’ 역시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에 큰 방향성이 됐다. 1968년 미국 유학을 갔다 체류를 포기하고 귀국한 이유이기도 했다. “6·25전쟁 때 또래의 청년들이, 또 서울대 의대 학우들이 학도병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이 늘 마음 아팠어요. 군산 도립병원에서 상이군인도 많이 봤고요. 제게는 다 마음의 빚이었습니다. 그들을 기억하며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의료 활동과 봉사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애국은 병원과 대학의 설립 이념이기도 했고요.”
실제 의사 이길여의 행적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키워드가 ‘보증금 없는 병원’ ‘의료 취약지역 병원 설립’이다. 1950년대는 의료보험 체계가 정착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병원에서는 보증금을 내지 않으면 환자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1958년 인천시 용동에 문 연 ‘이길여 산부인과’는 돈이 없어 병을 키우거나 안타까운 희생이 생기지 않도록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또 돈이 없어 밤에 사라지는 환자를 수소문하지 않고 그냥 두거나, 가난한 이들의 진료기록에 X를 미리 해둬 접수처에서 모른 척 내보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들은 후에 답례품으로 가져온 쌀과 생선, 제철 먹거리가 병원 1층을 채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1982년 양평 길병원 개원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사진 가천대
동네 병원이던 이길여산부인과가 1987년 인천 구월동에 ‘중앙길병원’으로 확장한 이후, 사회 공헌 역시 규모가 커졌다. 의료 취약지 병원을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양평(1982), 철원(1988), 백령도(1995)에 문 연 병원은 매년 적자가 1억~ 4억원까지 났지만 지자체에 운영권을 넘길 때까지 지역 소외계층에 대한 진료는 계속됐다.
백령도 병원에서 시작된 효행상
백령길병원은 2001년 운영을 중단했지만 또다른 기부의 불씨가 됐다. 이 총장은 서너 차례 백령도를 오가며서 ‘효녀 심청의 고장에’ 심청 동상을 세웠다. 1999년 인천 옹진군이 심청각을 개관 하면서 동상 제막식이 열렸고, 이 총장은 때맞춰 ‘심청 효행상’도 제정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상을 만들기 일 년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는 마음이 컸어요. 어머니가 지극한 효녀이자 효부였기도 했고, 어릴 적 마을 사람들에게 ‘심청전’을 읽어주시던 기억이 생생했거든요.”
이 상은 가천문화재단이 매년 시상하며 2021년까지 24회 수상자가 나왔다. 지금은 남학생까지 대상을 확대했고 22년에는 가천효행대상으로 명칭을 바꿨다.
2009년 MBC 교양프로그램 ‘성공시대’를 통해 이 총장을 인터뷰한 송진구(경영학) 가천대 교수는 그를 ‘가장 인상적인 리더’로 기억한다.
MBC 교양 프로그램 '성공시대' 출연 장면.
“경영자인데 돈이 안 되는 일을 자꾸 벌였잖아요. 투자하는 순간 바로 적자인 게 뻔한데도요. 수익 창출이 최우선인 보통의 경영과 다른데 왜 성공했을까, 정말 궁금했어요.”
그는 이 총장과 여러 번 만나면서 서서히 답을 찾았다고 한다. “보통 성공하는 사람들은 야망을 쫓는 게 1순위인데 왜 총장님은 다르냐고 여쭤 봤어요.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어요. ‘누구를 진짜 도와줄 수 있으려면 매 순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일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송 교수는 성공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미래 기억’이 그에게도 통한다는 말을 보탰다. 미래 기억이란 과거가 아닌 미래의 긍정적인 모습을 머리에 그려 넣는 것. 일찌감치 성취감을 느끼면서 중간 과정이나 노력을 즐기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선물을 준비하다 보면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벌써 행복하잖아요. 그런 삶의 에너지가 이 총장에게는 늘 있으니 늘 건강할 수밖에 없죠.”
‘남을 도와주다 보니 뭔가 일이 되더라’라는 말은 비단 병원의 사회 공헌에서만 나타난 일은 아니었다. 가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가천박물관’이 인천 유일의 국보 ‘초조본 유가사지론(初雕本 瑜伽師地論) 권 53’을 보유하게 된 계기도 남을 돕다 벌어진 일이었다.
가천박물관 소장 국보 ‘초조본 유가사지론(初雕本 瑜伽師地論) 권 53’. 사진 가천대
“1970년대 중반에 고서점을 운영하는 중년 남자가 찾아 왔어요. 집안 대대손손 내려오는 고서가 있는데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하길래 3000만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죠. 그런데 고서를 일단 들이고 나니 전시회에 나가지 않는 책들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어요. 나중에 거기서 국보가 나온 거예요.”
1993년 이 고서가 국보로 지정되면서 박물관 건립에 가속이 붙었고, 2년 뒤 ‘가천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의료 관련 국가 지정 문화재, 이길여산부인과 시절부터 보관해 온 의료 기구 등 1만8000여 점을 보유한 국내 최대 의료사 박물관이자 국내에서 가장 많은 간행물 창간호를 소장하며(5357권) 인천의 명소가 됐다.
이 총장의 자택 역시 박물관과 마주해 있다. 현재 집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데, 마당과 연결된 공터에 인간문화재 최기영 대목장이 도편수를 맡아 전통 한옥 양식으로 ‘가천의료사교육관’을 짓고 있다.
가천문화재단이 인천 옥련동에 마련하고 있는 가천의료사교육관 현장. 최기영 대목장이 맡아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짓고 있다. 사진 가천대
“6월에 완공되면 집은 물론이고 박물관도 가천문화재단에 모두 기증할 예정이에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물건이 우리 할머니가 결혼할 때 가져오신 물병이거든요. 어머니도 참 아끼셨고요. 저는 그것도 박물관에 다 두려고 해요. 전 물려줄 자식도 없잖아요. 사는 동안은 환자와 학생에게, 떠날 땐 후세에 아낌없이 주고 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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