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번호
- 94299
중앙일보 Leader&Reader '청춘 이길여' 6편 '200분 대본 다 외우는 89세, 그런 이순재도 이길여 후배'
- 수정일
- 2024.02.19
- 작성자
- 홍보실
- 조회수
- 2546
- 등록일
- 2024.02.19
잠시 ‘번외’ 편으로 길을 튼다. 이길여 총장의 주변인들을 만나던 중,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해서다. 주인공은 이 총장의 서울대 후배이자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강단에 서는 배우 이순재. 그 역시 89세로 현역 배우 중 최고령인데, 직접 만나 보니 이 총장에게서 느껴지는 청춘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배우는 끊임없는 도전”이라는 그의 말 속에선 ‘이길여-이순재의 평행이론’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만큼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1. 200분짜리 연극 소화하는 강철 체력…에너지 보충은 고기
이씨는 2021년에 이어 지난해 6월 연극 ‘리어왕: King Lear’ 무대에 올랐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 두 딸의 아첨에 넘어가 미치광이 노인으로 전락하는 주인공의 극적인 변화를 연기한 것. 원작을 각색하지 않은 대본으로 3시간20분이나 되는 실연 16회를 혼자 소화했다.
무대에서만큼의 카리스마는 아니었지만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단단했다. 두 시간이 넘어가는 대화에서 꼿꼿함을 잃지 않았다. 2013년 예능 ‘꽃보다할배’에서 쉬지 않고 걷는 ‘직진순재’의 남다른 체력이 여전해 보였다.
비결을 물었으나 이 총장처럼 답은 싱거웠다. 식사를 거르지 않으며 특별히 챙겨 먹는 음식도 없단다. 22년 9월부터 네 작품을 연달아 하다 보니 연극 이후 10㎏ 살이 빠져 고기를 자주 챙겨 먹고 있다는 게 꼽을 만한 특징이었다.
“지난해 욕실에서 넘어져 사흘 입원하면서 겸사겸사 건강 체크를 했어요. 이 나이 먹도록 병원 신세를 한 번도 진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잘됐다 싶더라고요.”
#2. 늦게 배웠지만 가장 즐기는 취미는 골프
이 총장처럼 즐기는 운동 역시 골프였다. 72년 처음 배웠는데 ‘중지 기간’이 있었던 것도 똑같았다. TBC 시절 골프연습장에서 누군가 “탤런트 나부랭이가 골프를 다 친다, 세월 좋아졌구나”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 당시만 해도 배우를 ‘딴따라’로 낮춰 보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골프를 치면 배우가 돈 많이 번다는 오해가 생기겠구나 싶었죠. 당장 그만뒀어요.”
그러다 82년 쉰이 넘어 다시 클럽을 잡았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즐기는 편이다. 지난해 여름 더위가 가시지 않았던 인터뷰 당일에도 아침 일찍 연기자 후배들과 18홀을 돌고 왔다는 ‘수줍은’ 고백을 했다. “스코어는 예전만 못해 100대로 내려왔지만 타수에 연연하지 않아요. 그저 운동으로만 즐겨도 좋습니다.” 언제 어떤 스케줄이 생길지 모르는 업의 특성상 헬스처럼 규칙적이지 않더라도 한 번 나가 많이 걸을 수 있다는 이유를 보탰다.
이씨의 또 다른 체력의 비결은 단연 금주다. 배우 오래 하려면 술부터 끊으라는 말을 후배들에게도 자주 한다고 했다. 20년 넘게 연극계에 있던 배우로서는 쉽지 않은데, 그 계기가 처음부터 건강 관리는 아니었다. “젊을 때 술만 마시면 가게에서 싸움이 벌어지더라고요, 배우니까 사람들이 알아보긴 하는데 무시하는 말이 많았거든. 걸핏하면 시비가 붙으니 그때 결심했어요. 술은 절대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3. 업의 본질과 원칙으로 산다
이씨를 배우로 이끈 건 영화 ‘햄릿’이었다. 서울대 철학과 2학년에 다니던 1955년, 서울 충무로 스칼라극장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 명대사를 듣는 순간 이건 예술이구나 소름이 쫙 끼쳤어요.”
당시 배우이자 연출가인 로런스 올리비에가 햄릿으로 나왔는데, 이후 빠져들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공동 작업을 할 정도로 작품을 재해석할 수 있는 배우가 있다는 점에서 롤모델로 삼았고, 서울대 연극부를 재건해 이끌고 실험극장이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더라도 누군가를 감동하게 할 수 있다면 괜찮다는 원칙만 생각했어요.”
‘의사는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켜 온 이 총장처럼 그도 ‘업의 본질’에 인생을 걸었다. 연극에서 영화로 옮겨가 조연 단역만 할 때도 ‘우리는 연기를 하러 온 사람이니까’ 상관없었다고 했다. 78년 드라마에 출연하며 22년 만에 처음 출연료라는 걸 받으면서까지 배우의 삶을 버텼던 이유였다.
“인생이라는 게 가끔 손해 보더라도 큰 손해는 아닙니다. 지금 나처럼 국민배우 소리 들으며 오래 배우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손해’를 보더라도 ‘민폐’는 끼치지 않겠다는 건 그의 지론이기도 하다. NG를 내지 않겠다는 것에 민감하다. 그래서 촬영 석 달 전부터 대본을 외운다. “사극 같은 대작은 온종일 내가 대사 하기만 기다리는 단역들이 있어요. 그들도 나처럼 배우 아닙니까. 내가 누가 될 수는 없죠. 대사 자꾸 까먹으면 배우 관둬야 해요.”
#4. 67년 경력에도 작품 공부는 필수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서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아. (중략) 부자들아 가난한 땅이 고통을 몸소 겪어봐라. 그리하여 그들에게 넘치는 것들을 나눠주고 하늘의 정의를 실천하자.”
‘리어왕’ 출연을 이야기하던 그는 극 중 명대사를 숨도 쉬지 않고 읊었다. 작품을 공부하다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대사라 지금도 술술 나온다며, 그것이 고전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했다. “최고 권력자가 나락으로 가서야 미처 살피지 못했던 백성의 삶을 이해하는 스토리 속에 현대에 주는 메시지가 있어요. 리더십의 핵심이 여민동락이라는 건데 이건 지금도 유효한 게 아닌가, 배우가 작품을 한다는 건 이런 나름의 해석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그래서 촬영장에 갈 땐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품는다. 배우에게 작품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어서다. 1969년 김기영 감독과의 ‘미녀 홍낭자’ 촬영은 기억에 남을 경험이었다. 대감독과 의상을 두고 의견이 달랐지만 콘티를 예습해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니 결국 그의 말을 들어줬다.
“젊은 배우들이 깡패 양아치 연기는 잘하는데 이상의 지적 표현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지식인의 말과 상인의 말은 다르잖아요. 결국 인문학적 소양이나 언어 표현이 돼야 하는데, 이건 본인이 평생 연구할 수밖에 없죠.”
이씨가 고수하는 암기력 체크 방법도 일종의 ‘공부’다. 200년 만에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 역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대통령 이름을 초대부터 외워 나간다. 익히 아는 인물 외 1년짜리 단기 대통령까지 빼놓지 않는데,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역사의 굵직굵직한 순간에서 이들의 판단과 결정을 연대기로 기억하며 자신을 점검한다.
#5 영원히 도전하는 게 건강 비결
이씨에게 연극 ‘리어왕’은 선물 같은 작품이었다. 60년 배우생활에도 ‘말괄량이 길들이기’ ‘맥베스’만 연기해 봤던 그가 방송에서 ‘리어왕을 해보고 싶다’라고 한 걸 본 제작사가 공연을 제안해 왔다.
그는 출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축약이나 각색 없는 대본, 고전을 완벽히 재현한 의상과 무대장치, 무엇보다 더블 캐스팅 없이 혼자 책임지겠다는 건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하지만 2021년 토월극장에서의 초연이 전 회차 매진되면서, 그는 ‘제대로만 하면 관객은 얼마든지 있다’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씨는 배우로 살며 “평생이 도전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작품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아내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다. 지난해 8월 촬영한 코미디 드라마 ‘개소리’의 역할 역시 67년간 거쳐 온 배역과는 또 달랐다. 국민배우에서 갑질 배우로 추락하며 지방에 내려온 이씨가 개소리를 알아듣게 되면서 사건 해결사로 활약하는 이야기다.
“내가 몰랐던 한 인물을 만나고 또 만들어가는 건 늘 어렵죠, 내 본래 기질과 다를 땐 더 그렇고요. 하지만 이게 또 내게 주어진 과제니까, 오늘 하루를 보내는 동력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건강하게 배우 할 수 있는 비결은 이게 아닐까 해요.”
시리즈 바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