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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Leader&Reader '청춘 이길여' 5편 - 90 넘은 이길여 “너희들 125세까지 살 텐데 공부해라”
- 수정일
- 2024.02.05
- 작성자
- 홍보실
- 조회수
- 3017
- 등록일
- 2024.02.05
“2022년 말에 총장님의 자서전 『길을 묻다』가 나온 직후 오랜만에 만났어요. 책도 그렇고 옛날이야기나 가볍게 할 줄 알았는데 웬걸요. 1시간 만나서 40분 넘게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라는 말이 오갔죠. 보통 그 연세면 추억을 곱씹거나 건강 이야기를 하지 않나요. 그런데 총장님 입에서는 AI, 챗 GPT가 가장 많이 언급됐어요.”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
이 총장을 두고 ‘젊다’고까지 표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체력·주름·걸음걸이·성량 같은 외연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일수록 ‘새로움과 내일에 대한 호기심’이 진짜 건강 비결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장수와 학습의 연관성을 입증하는 연구는 이미 많은데, 그중에는 오래 사는 사람의 60%가 ‘새로운 학습에 도전했다’는 결과도 있다. 배우는 과정에서 몰입하는 즐거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새로 얻은 지식을 통해 현상을 이해하고 안정감을 찾음으로써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말하는 이 총장만의 자기 주도 학습은 어떤 것일까. 일상을 들여다봤다.
# 이 총장의 집은 작은 뉴스룸이나 다름없다. 거실의 큼지막한 테이블 위에는 늘 신문이 수북이 쌓여 있다. 바퀴가 달린 이동 테이블 위에도 언제든 손 뻗으면 잡힐 수 있도록 신문을 둔다. 매일 아침, 중앙일간지부터 지방지까지 헤드라인이라도 빠르게 훑는 게 중요한 일상이다. 주요 일간지의 경우 사설을 읽는 걸 빼놓지 않는다.
집에 있는 동안 즐겨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역시 뉴스다. 지상파 외에 종합편성 채널이 늘어나면서 “뉴스 하나가 끝나면 채널을 돌려 다른 뉴스를 보는” 시청 패턴이 굳어졌다는 게 주변인들의 전언. 이 총장이 ‘뉴스 마니아’를 자처하는 건 다양한 분야의 이슈에서 ‘메가 트렌드’를 파악하고 업무에 적용하려는 목적이다.
실제 아침 신문에 ‘전기차 시대에 대학은 내연기관을 가르친다’는 기사가 나온 날, 이 총장은 곧장 관련 학과 회의를 소집해 우리는 뭘 가르치는지, 잘하고 있는지 진단해 보라고 지시했다. 좀 더 깊이 있는 주제일 땐 관련 전문가를 초빙해 세미나를 하는 식으로 확대하기도 한다. 경원대와 가천의과학대 통합 역시 ‘학령인구’라는 말이 생경했던 20여 년 전부터 학생 수가 줄어들면 대학의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앞서 고민한 결과였다.
# 이 총장이 새로운 정보를 얻는 인맥은 누구일까. 다양한 네트워크가 있지만 가장 큰 카테고리는 역시 기자와 교수다. “세상 흐름을 가장 빠르게 알고, 전문적 지식을 지닌 이들”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기자를 통해 관심 분야의 전문가를 발굴하고 학교와 병원에 등용한 사례도 적지 않은데 김충식 특임부총장, 오대영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등이 모두 기자 출신이다.
“예전 병원을 확장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나 뭔가 고민거리가 생기면 친분 있는 기자를 찾았어요. 업계지나 전문지 편집국장 같은 분한테 전화해 아침 좀 같이 먹자, 그러고는 서울을 2~3시간 걸려 가서 만났죠. 지금도 주변 직책자들에게 뉴스 많이 보고 언론과 가까이 지내라라는 조언을 많이 합니다.”
# 이 총장을 주말마다 찾는 건 조카 부부인 이태훈 길병원 의료원장과 최미리 가천대 수석부총장이다. 두 사람은 병원과 학교라는 가천길재단의 두 가지 큰 축을 담당하는 인물들이다. 자연스럽게 가족이면서도 공적인 이야기가 오갈 수밖에 없고, 이 총장의 머릿속을 가장 잘 들여다보는 위치다.
세 사람은 주로 토요일 오후, 이 총장의 인천 자택이나 강원도 평창의 세컨드 하우스에서 모인다. 오후 5시쯤 이른 저녁을 마치고 차 한잔을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는 여느 가족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어느 정도 대화가 무르익으면 이 총장의 입에서 한마디가 나온다.
우리 콘퍼런스합시다.
이른바 위켄드 콘퍼런스는 두 사람이 보직을 맡은 10년 전부터 시작된 일종의 리뷰&프리뷰 자리다. 병원과 학교에 대해 지난 한 주간 중요했던 일, 돌아올 한 주에 닥칠 일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는데 여기에 미래를 향한 식견이 더해진다. 이 총장은 식사 전 미리 백지에 그 리스트를 적어 둔다.
“우리 의견을 듣고 당신 생각을 이야기하며 짚어가는 자리죠. 어릴 적 추운 날 대청마루에서 제사를 지내본 사람은 그런 기억이 있잖아요. 한 장 한 장 지방 태우는 거 보면서 저게 다 언제 없어지나,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요. 콘퍼런스할 때 제가 그런 마음이에요. 총장님 리스트가 오늘은 얼마나 되나, 슬쩍 체크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죠. 그런데 막상 하다 보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말씀하시는 게 있어서 새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요. 지시를 내리기 전에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알려주시는 자리라 우리가 많이 배워요.”(이태훈 원장)
이 총장이 주마다 특별한 ‘인생 수업’을 마련하는 셈인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어려서부터 내가 키운 자식이 아니니 해 줄 말이 많아요. 그동안 어떻게 했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제가 만날 그래요. 너희들은 125세까지 살 텐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살 거냐고요.”
# 이런 ‘콘퍼런스’가 얼마 전까지 집 밖에서도 있었다. 고 이어령 교수, 김병종(가천대 석좌교수) 화백과의 만남이다. 셋의 회동이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었지만 팬데믹 전까지 종종 이뤄졌다. 이 교수는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나라 대표 지식인으로, 김 화백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작가로 이 총장과 오래 끈끈한 인연을 이어왔다.
이 교수의 경우 1991년 가천문화재단 설립 시 조언해 준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가천대 교가를 작사하고 학교 대표 교양강좌인 ‘지성학 강의’의 첫 강연자로 참여하면서 이 총장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이 총장 역시 2009년 이 교수가 추진하던 나눔공동체 사업 ‘세 살 마을’에 힘을 보태며 뜻을 함께했다. 서로 우군이 되어준 셈.
김 화백과 이 총장의 연은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길여 산부인과가 있던 동인천 동네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당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이 ‘이길여처럼 돼라’였다. 병원 창밖에서 ‘늘 바삐 움직이는 의사선생님’을 구경만 하던 소년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서울대 동창회에서 이 총장을 재회할 수 있었다.
# 언뜻 보면 공통점이 없는 세 사람이지만 김 화백은 “정작 만나면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공통점은 바로 ‘생명’이었다.
이 교수는 생전 ‘생명 자본주의’를 주창해 왔다. 생명에 대한 가치를 인지하고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복원함으로써 자연이 경제 활동의 자본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꾸준히 펴 왔다. 김 화백 역시 ‘생명 작가’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생명이라는 주제 아래 연작을 선보였다. 생명의 귀함, 생명으로부터 받는 위로 등을 표현해 당대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이 교수가 김 화백을 두고 ‘생명의 동행자’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총장님도 생명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는 데는 저희 두 사람과 다를 바 없죠. 소중한 생명을 받아내는 의사이자 그 생명이 온전히 성장하도록 돕는 교육자라는 점에서요. 셋이 만나면 서로 생명 철학과 비전을 많이 공유했습니다.” 이 교수가 2019년 암 진단을 받으면서 세 사람의 대화는 더 무르익었다. 생명의 탄생만이 아니라 소멸까지 폭넓게 다뤄졌다.
김 화백은 두 사람의 대화가 매우 특별했다고 기억했다. 호기심 많은 두 어른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는 화두만으로 두세 시간을 채워 나갔기 때문이다.
“물론 90%는 달변가인 이 교수님이 말씀하셨지만, 총장님도 경청하시다 단문으로 짧게 의견을 내시고 아이디어를 탁탁 주시곤 했죠. 두 분 모두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고, 보기에 참 아름다웠어요. 문학·사학·철학이 통하는 사람끼리의 지식향연, 그 자체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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