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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73
[공통] [인터뷰]서진석 동문(응용미술학과86) 부산시립미술관장 취임
- 수정일
- 2023.11.10
- 작성자
- 홍보실
- 조회수
- 839
- 등록일
- 2023.11.09
부산만의 '글로컬리티'로 세계적인 미술관 만들 것
열정과 욕심을 갖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문화지식인이 되길
서진석(응용미술학과86) 부산시립미술관장
본교 서진석 동문이 지난달 16일 부산시립미술관장에 취임했다. 개방형직위로 공개모집을 통해 선정된 서관장은 취임 직후 ‘글로컬 미술관’ 변신을 위해 대규모 리모델링 작업을 시작으로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다. 홍보실에서 자랑스러운 서진석 동문을 만나 취임 소감 등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1. 부산시립박물관장 취임을 축하합니다. 어린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미술을 전공하게 된 동기를 듣고 싶습니다.
어릴 적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초등학교시절 미술학원도 다녔고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 수상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진학 후 본격적으로 미대 준비를 했는데 저는 수리·논리쪽 보다 창작과 상상을 좋아하는 감성적인 학생이었습니다.
2. 입학 당시 가천대(구 경원대)는 사실상 신생대학 이었습니다. 가천대 진학을 결정하게 된 동기는 ?
가천대 미대에 진학하게 된 것은 저에게 큰 기회였습니다. 한마디로 ‘Lucky!’ 였어요. 신생대학이다 보니 기존 미대와는 학업 시스템 이나 풍토가 달랐습니다. 저희 세대는 위계가 있는 주입식 교육이 초중고뿐 아니라 대학에서도 이루어 졌습니다. 대부분의 미술대학이 과거의 도제식 교육, 근대화 교육시스템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가천대 미대는 소위 메이저 미대와 달리 새로운 시스템으로 다양한 분야의 교강사진을 영입하게 됩니다. 유학자율화로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신진작가들이 대학으로 유입되는 시기였으며 이들의 화풍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학교가 가천대학교 였습니다. 자유롭고 실험적인 시도로 유명했던 최정화, 이불 작가 등이 우리대학을 거쳐갔습니다.
이 영향으로 홍경택, 임흥순, 이환곤 을 비롯한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작가와 덕성여대 이재범 교수처럼 교육계로 진출한 동문 등 미술계에서 ‘가천대 사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대가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3. 대학시절 장학금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이셨다고 들었고 졸업 후에는 섬유·조각으로 시카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시는 등 작가로서도 충분히 실력을 인정 받았을 텐데 기획자로 변신을 하게 된 계기는?
저는 대학 3학년때부터 유학을 준비해 졸업하자마자 바로 도미 했습니다. 당시 미국 유수의 명문 미술대학에 입학지원서를 제출했는데 시카고 대학 뿐 아니라 더 크램브루, 캘리포니아 아트인스티튜트, 템플인스티튜트 등 원서를 낸 학교에 모두 합격했습니다. 대학 때 배우고 느끼고 경험한 대로 만든 포트폴리오가 외국의 명문 미대에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저를 지도해 주신 대학원 교수님으로 부터, “한국의 각 대학에서 매년 수많은 학생들이 포트폴리오를 내는데 작업은 좋으나 특정대학 별로 작품이 유사해 선발이 어려웠다. 그런데 너의 작품은 매우 독특하다는 평을 받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대학원 시절, 원하는 학교에서 좋아하는 과목을 전공으로 선택한 저는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게 공부했습니다. 학위를 받은 이후에도 미국내 다른 대학에서 관심있던 패션, 사진 등 하고 싶었던 공부를 마음껏 했습니다. 서른살 이전에는 해보고 싶은 것 들을 마음껏 해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도 만들어갔습니다.
입국 후 섬유·설치 조각으로 작업활동을 하면서 유독 우리나라에만 젊은·무명작가들을 위한 전시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업미술관, 국·공립미술관 외 신진작가들이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비영리 미술공간의 필요성을 느껴 대안공간운동을 통해 ‘Loop’라는 스페이스를 만들게 됩니다.
1990년대 IMF를 전후해 해외유학파 인재들이 국내에 유입되고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다양한 국제행사들이 열리며 문화예술계에 세계화 바람이 불게 됩니다. 아울러 기성작가들만의 리그에 학연과 세대를 벗어난 젊은 작가들이 급부상하고 비주류 문화운동도 시작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가천대 미대가 한창 피어오르던 시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부터 전시기획으로 방향을 돌리게 됐습니다. 예술이나 미학을 전공하지 않고 저처럼 순수미술을 전공하다 기획자가 된 케이스가 흔하지는 않습니다.전시기획자는 작가에 이은 ‘제2차 생산자’라 생각합니다. 작가가 대중과 소통하고 작품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획자로 15년 간 ‘Loop’를 운영하며 정말 즐거웠습니다.
4. 백남준 아트센터, 울산시립미술관, 현재 부산시립미술관 우리나라 유수의 미술관장으로 임명되며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계신데요 소감이 어떠신지요?
기획자로 일하는 동안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디지털테크놀로지’ 가 문화예술계를 포함한 사회 전반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기획자로 쌓아올린 글로벌 네트워크도 한몫 거들었는지 48세 젊은 나이에 최연소 국·공립 미술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미래형 글로컬 미술관을 지향하던 울산시립미술관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되었고 미술관의 하드웨어 뿐(건물) 아니라 소프트웨어(제도, 조직운영)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커리어들이 인정돼 부산시립미술관 관장에 임명된 것 같습니다.
5. 향후 부산시립미술관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 예정이신지요 ?
기존 20세기 우리가 알던 유명 미술관인 퐁피두, 루브르, 모마, 구겐하임 등은 동시대 미술관의 기능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21세기에는 전혀 다른 유형, 다른 사회적 기능의 미래형 미술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어디가 될 것이냐, 어떤 미술관이 될 것이냐가 미술계의 글로벌 화두입니다.
부산이 가지고 있는 문화사적 정체성, 도시특유의 포용력과 주체성은 미래형 미술관을 제안하고 만들어 나가는데 매우 적합한 풍토입니다. 지역기반을 두고있는 문화예술인들, 제가 가진 글로벌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해 부산만의 글로컬리티로 세계적인 미술관의 토대를 만들고자 합니다.
6.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매 학기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잘 노는 학생이었지요. 누가 술을 많이 먹는지 게임도 하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가천대는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만끽 할 수 있는 환경을 주었습니다. 좋은 선생님께 배우다 보니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놀고, 먹고, 마시고, 공부하고. 이것이 훗날 제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7. 후배들에게 당부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단군이래 최대의 기회가 왔다고 자주 말합니다. ‘제품을 파는 기업은 문화를 파는 기업의 하청’이지요. 21세기 사회경제 메인 성장동력은 자본력, 기술력, 노동력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입니다. 모든 젊은이들에게 해당되는 말 이기도 하고, 특히 저와 같은 길을 걷는 예술전공의 후배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움추린 개구리가 더 멀리 뛴다는 것은 옛말입니다. 바로 뛸 수 있는 자세, 그냥 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아젠다라면 실패도 인정해 주는 시대입니다. 한국의 문화는 아시아를 너머 세계의 중심입니다. 그런 좋은 공간에 살고 있는 여러분들, 열정과 욕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시도하는 문화지식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