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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Leader&Reader '청춘 이길여' 4편 - 92세 이길여, 공 뻥뻥 날린다…‘에이지 슈트’ 비밀 담은 영상

수정일
2024.01.31
작성자
홍보실
조회수
2356
등록일
2024.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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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7월 병원 보직자들과 라운드하는데 거리를 재러 홀 가까이 와 보지도 않고 라이도 잘 안 보고 퍼트를 갖다 대시더라고요.”(김우경 가천대 길병원장)


“같이 쳐 보면 알겠지만 느릿느릿 걷다 툭 치고 가는 어르신들 골프가 아니에요. 공이 뻥뻥 날아갑니다.”(최미리 가천대 수석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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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장은 상체 꼬임을 최대한 살리는 '꽈배기 권법'으로 드라이버 장타를 유지한다. 사진 가천대


이길여 총장을 오래 알아온 사람마다 한 번씩 입에 올리는 화제가 있다. 바로 골프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필드에 나가 클럽을 잡을 수 있다는 것만도 대단한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몇몇은 이 총장이 샷을 날리는 휴대폰 영상을 마치 ‘증거물’처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목격담이 아니라도 이 총장의 골프 실력은 이미 ‘공증’돼 있다. 78세(2010)에 이어 84세(2016)에도 에이지 슈트(18홀 경기에서 자신이 나이와 같거나 그 이하로 스코어를 내는 것)를 한 것. 골퍼로서는 홀인원이나 이글, 알바트로스보다 더 자랑할 만한 기록인데, 나이가 들어서도 실력과 체력이 모두 받쳐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수준급 아마추어 골퍼도 60대 타수가 나오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통상 70대에서나 도전해 볼 법하다.


그는 지난해 10월 초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한글날) 연휴 사흘 내내 18홀 라운드에 나섰다”며 “앞으로 에이지슈트할 확률이 더 높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50대부터는 평생 할 운동으로 골프를 배우라”는 조언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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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즐기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클럽을 처음 잡은 건 1970년. 당시 병원 병리과장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막상 실전에 나서기엔 한창 바쁠 때라 틈을 내지 못했다. 87년 중앙길병원을 짓고 나서야 숨 돌릴 여유가 생겼지만, 이때는 또 사회 분위기를 탔다. 노태우 정부 시절 유독 수해가 많아 사회 지도층이 골프를 자제하는 분위기였고, 김영삼 정부에서는 아예 ‘공무원 골프 금지령’이 내려진 것. 결국 90년대 후반 60대 중반이 돼서야 이 총장도 본격적으로 잔디를 밟을 수 있었다.


늦깎이 골퍼였지만 실력은 크게 뒤지지 않았다. 86~87년 사이에 다진 기본기가 빛을 발했다.


“당시 인천에는 오전 4시에도 문을 여는 승마장이 있었어요. 새벽에 일어나 그곳에서 한 시간 말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골프 연습도 한 시간씩 했죠. 그런데 그때는 지금처럼 자동으로 공이 올라오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나씩 놔 줬거든요. 그중에 캐디 경력자가 많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코치를 받을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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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명 선수의 스윙 슬로모션을 보며 이를 따라하기도 했다. 사진 가천대


지금처럼 유튜브나 동영상이 없던 시절이라 아널드 파머나 잭 니클라우스 같은 유명 골프의 스윙 사진을 보면서 자습을 했다. 잡지에 연속 카메라로 찍은 슬로 모션 사진이 나오면 따라 해 보면서 스윙의 정석을 만들어 보려고 한 것이다.


잠이 적은 이 총장에게 새벽은 운동하기 더없이 좋은 시간이 됐다. 여자 의사들과 잡았던 골프 티업 시간이 오전 4시. “예전엔 그 시간이면 예약 없이 현장에 와서도 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깜깜해서 공이 안 보이는 거죠. 그럼 티박스 주변에 둘러앉아 수다 좀 떨다가 공이 보인다 싶으면 그때부터 치기 시작하는 거죠. 한 세 홀쯤 지나야 해가 뜨면서 공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게 되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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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장이 꼽는 골프의 매력은 단연 ‘손맛’이다. 특히 드라이버가 정타를 맞고 시원하게 날아가는 그 순간의 짜릿함이다. 실제 그와 라운드해 본 사람들은 모두 이 총장의 티샷을 인정한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자타공인 ‘드라이싱’(드라이버로만 보면 싱글감).


이 총장이 인터뷰 중 자랑 삼아 소개한 ‘장타 일화’도 있다. 15년 전쯤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 회장과의 라운드인데, 그와는 90년대 후반까지도 1년에 두 번씩, ‘안양에 벚꽃 필 때, 원주에 단풍 들 때’ 라운드를 가질 정도로 필드 인연이 깊은 사이다.


“안양CC가 원래 남녀 티가 크게 거리 차이가 안 나는데, 세컨드샷을 치러 가 보니 내 공이 더 앞에 나가 있더라고요. 그때까지 윤 회장이 이리저리 코치를 많이 해줬는데 반전이 돼버렸죠. 나중에 캐디한테 물어보니 210야드(192m)쯤 된다고 귀띔해 주더라고요.”




아담한 체격에다 나이가 들어서도 장타가 가능한 비법은 뭘까. 최미리 수석부총장이 여기에 답을 내줬다. 일명 ‘꽈배기 권법’이다. “몸을 최대한으로 꼬았다가 다시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힘을 이용하는 거죠.” 유연성과 근력이 모두 있어야 하는 스윙이라면서, 대화 중간에 휴대폰을 꺼내 이 총장의 드라이버샷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직접 촬영한 모습이었다.


“60대인 저와 남편, 총장님이 같은 티에서 치는데 열 번 중 세 번은 저랑 비슷하거나 저보다 더 많이 나가요. 그걸 보면서 저희끼리 그러죠. ‘우리가 저 나이 때 저렇게 칠 수 있을까’”라고요. 필드 나갈 때마다 이런 화제로 늘 이야기를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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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도 실력이지만 이 총장의 골프 스타일은 그가 일하는 방식과 매우 닮아 있다. 송진구 한국리더십대학 원장 겸 가천대 교수(자유전공)는 “과감하게 거침없이 치는 스타일이 평소 의사 결정하는 방식이나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모습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말한다. 공을 앞에 두고서 할까 말까 재거나 주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윤은기 회장도 여기에 공감했다. 드라이버를 날리고 나서는 기쁘거나 아쉽거나 하는 감정 표현 대신 세컨드샷으로 직진한다는 것. 티샷 이후부터는 스코어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평소 그의 신조 그 자체다.


“예를 들면 거리가 애매할 땐 연못을 넘겨 치느냐, 돌아서 가느냐 망설여지는 경우가 생기잖아요. 대부분 그러면 공을 살리고 싶고 안전하게 가는 방법을 택하죠. 그런데 총장님은 안 그래요. ‘이거 뭐 안 넘어가면 어때, 한번 때려보는 거지’ 이런 식이죠. 원래 스포츠가 수비보다는 공격을 보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라 총장님이 샷 자체를 시원시원하게 때리면 동반인들도 흥미진진한 관전이 됩니다.”


미스샷이 나도 절대 멀리건을 받지 않는다거나, 파3에서 앞 팀이 홀아웃하기 전에는 티를 미리 꽂아두지 않는 것처럼 원칙을 지키는 것도 ‘이길여다운’ 운동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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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전 스트레칭하는 모습. 사진 가천대


골프를 즐기며 운동만 하는 건 아니다. 일명 ‘필드 세미나’다. 잔디를 걸으며 정보를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기회로 삼는다. 친분이 딱히 없어도 현 이슈와 관련된 전문가나 교수, 기자 등이 이 총장과의 라운드에 자주 초대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이 대화가 필드에서만 끝나지 않을 경우 뒤풀이에서 ‘19홀 세미나’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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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장은 자서전 『길을 묻다』에서 78세에 78타를 치면서 “인생의 전환점에 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파워와 열정만 있다면 80대 나이엔 80타를, 90대 나이엔 90타를 치면서 ‘에이지 슈터’의 영광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맛본 것. 일밖에 모르고 살던 40여 년의 인생이 헛헛해질 때쯤, 새로운 출발점에 왔다는 깨달음이었다.


 앞으로 에이지 슈트 할 기회는 누구보다 많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요. 나이 먹으니 좋은 점이 또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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